2012' 02. 07 중앙일보 34면 중에서
선진국의 병원 응급실은 생명이 위독한 순으로 진료한다.
우리는 다르다. 일단 피를 많이 흘리거나, 비명소리 큰 환자가 ‘장땡’이다.
정말 위태로운 뇌출혈이나 심장질환자는 밀리기 일쑤다.
요즘 우리 정치권이 그런 느낌이다.
목소리 크고, SNS를 좌우하는 집단에 복지 공약을 집중한다. 한마디로 표(票) 때문이다.
민주당은 고졸 청년에게 1200만원을 준다고 한다.
대학 반값 등록금과 형평성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취업 준비생과 젊은 창업자에게 똑같은 돈을 선물한다.
사병으로 제대하면 630만원을 준다.
여기에 들어갈 매년 33조원은 남의 이야기다.
복지 경쟁에 새누리당도 뒤지지 않는다.
전액 무상보육에다 학생들의 아침 급식까지 살뜰히 챙긴다.
사병 월급은 40만원까지 올린다.
표가 많은 30대 주부와 60만 사병에게 솔깃한 유혹이다.
이러다간 ‘군대에 취직한다’는 소리가 나올 판이다.
벌써 시장원리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 주부조차 “어린이집에 안 보내면 손해”라 안달이다.
덩달아 폐업한 유아원들이 먼지를 털고 프리미엄까지 얹어 거래되고 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1년 전 청주 우암산에서 한 남자 노인이 불에 타 숨졌다.
나뭇가지에 걸린 유서에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내 스스로 화장(火葬)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가 죽은 곳은 남의 묫자리.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이장(移葬)한 뒤 남은 움푹 팬 구덩이에
며칠간 참나무와 대나무를 차곡차곡 모았다고 한다. “
혹시 산불이 날까 봐 주변 낙엽은 미리 치워놓았다”는 유서의 말미가 가슴에 찡하다.
원래 무연고 사망자의 처리 예산은 60만원.
다행히 현지 구청장이 “마지막 길이나마 편안히 모시라”며 100만원을 더 내놓은 덕분에 제대로 된 제사상을 받고 떠났다.
복지의 기본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목소리 크면 이기는 응급실과 다르다.
절박한 순서대로 해야 한다.
중립적인 복지전문가들은 우선순위를 연금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노인,
그 다음으로 고교 무상교육을 꼽는다.
우리의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다.
절대빈곤에 몰린 독거노인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고 싶어도 호적상 자녀가 있으면 안 된다.
“늙으면 죽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스스로 화장하는 노인이 꼬리를 무는 비극적 현실이다.
고교 무상교육도 대학 반값 등록금보다 훨씬 절박하다.
의무교육인 중학교는 연간 10만원 정도지만,
고교 학비는 160만원으로 튄다. 없는 집엔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여기에다 소득 상위층은 대개 회사에서 보조가 나오지만,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저소득층 부모들만 학비에 허리가 휜다.
노인 자살은 침묵 속에 벌어지는 일종의 사회범죄다.
고교 학비 부담도 원조교제나 청소년 아르바이트 같은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복지논쟁에 노인과 고교생은 없다.
SNS를 모르거나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복지야 5년 전 허경영 대권 후보를 당할 자가 없다.
당시 허 본좌(인터넷에서 허 후보의 별명)는 노인에겐 매달 70만원,
결혼하면 1억원, 아이를 낳으면 3000만원, 한국전쟁 참전자에게 3억원을 약속했다.
어디 그뿐이랴. 전기료와 휴대전화는 무료, 400만 신용불량자에겐 무이자 융자를 다짐했다.
대학등록금은 완전 공짜였다.
그가 당선됐으면 가구당 최대 14억~16억원의 돈벼락을 맞았을 것이다.
여야가 목소리 큰 쪽부터 복지를 몰아주고 있다.
병원 응급실의 역설이다.
건강한 사병들과 대학생, 서울 강남 주부들이야 생활의 불편 정도지 목숨에 관계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정치권은 알뜰히 챙긴다.
표가 안 되는 빈곤 노인들이 소리 없이 목숨을 끊고 있다.
없는 집 자식들도 침묵 속에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내몰린다.
복지란 무엇인가에 앞서 정의란 무엇인가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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