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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행복&소망^-^]/믿음과말씀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욕망의 종교인가?

by 만경사람(萬頃人) 2016. 7. 6.

2016'     07.     06    아침   중앙일보에서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욕망의 종교인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7~8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7~8절)

마술 같은 소리다. 청하면 받는다니, 찾기만 해도 얻는다니, 문을 두드리기만 해도 열린다니 말이다. 한 마디로 ‘도깨비 방망이’다. “금 나와라! 뚝딱!”땅바닥만 두드려도 나온다. “은 나와라! 뚝딱!’ 내려치기만 해도 ‘우수수’ 쏟아진다. 그런 종교라면 “믿습니다!” 한 마디에 온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갈 터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위험하다. ‘왜곡의 지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사업도 번창할 것이고, 자식의 대입 수능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를 ‘강력한 기복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성경적 근거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 그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도 있고, 그렇게 믿는 신자들도 있다.

렘브란트는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1640년대 작품 ‘병자를 고치는 예수 그리스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고개 들지 않을 욕망이 있을까. 이 말을 듣고서 청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청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앞에서 내 안의 욕망을 청한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물음이 올라온다.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아니면 욕망의 종교인가.’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에고를 키우는 길이고, 다른쪽은 에고를 줄이는 길이다. 한쪽은 ‘나의 뜻’을 따르는 길이고, 다른쪽은 나의 뜻이 무너진 곳으로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예수는 후자를 따랐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채 그 길을 따랐다. 예수가 설한 그리스도교는 ‘욕망의 종교’가 아니라 ‘영성의 종교’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길이 싫은 걸까. 자꾸만 거꾸로 가고 싶을까. ‘영성의 종교’가 아니라 ‘욕망의 종교’를 따라가고 싶은 걸까.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기도하는 순례객들.

‘욕망의 눈’으로 보면 성경 전체가 ‘도깨비 방망이’다. 그 눈을 허물고 보면 다르다. 성경은 과학이다. 나와 인간과 세상과 우주의 존재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깊은 과학이다. 예수는 온갖 비유를 들어 그 속에 흐르는 이치를 풀어놓았다. 다만 그런 비유들이 우리가 가진 ‘욕망의 눈’을 관통하며 왜곡될 때가 문제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기도가 우리의 눈을 통과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가 되고 만다.

2000년 전에도 숱한 이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몸이 아픈 이들도 있고, 마음이 아픈 이들도 있었다. 삶에 대한 물음을 도무지 풀지 못해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또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게 아니다”라며 ‘기복적 태도’를 신랄하게 공격했던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예수가 말한 청함과 두드림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 걸까.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아르메니안 교회의 성직자들과 순례객들이 성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청하고 있을까.

불교의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구절이 있다. ‘마땅히 머무는 바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여기서 ‘머무름’은 집착을 말한다. 가령 어제 점심때 억울하고 불쾌한 일을 당했다고 하자. 하루가 지났지만 자꾸만 생각난다. 어제 일은 시간과 함께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도 자꾸만 떠오른다. 왜 그럴까. 내 마음이 ‘그 일’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끈적끈적한 집착제를 바른 채 ‘그 일’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마음이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머문다.

무언가 청하는 일. 무언가 찾는 일.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는 일. 그 모두가 ‘마음을 내는 일(生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신의 마음을 향해 내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 일으킨 마음이 신의 마음으로 흘러가길 바라는 일이다. 그게 기도다. 우리는 그렇게 청하고, 그렇게 찾고, 그렇게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기도할 때 ‘착(着)’이 생기면 어찌 될까. 애착이든 집착이든 말이다. 그럼 브레이크가 걸린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일으켜도 ‘접착제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붓다는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그 구절 앞에 ‘마땅히!’라는 말까지 넣었다. 붓다는 왜 그 말을 넣었을까.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는 대목 앞에 왜 ‘마땅히’라는 단어를 굳이 집어넣었을까. 이치이기 때문이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서 하늘로 떨어지지 않는다. 강물도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않는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이 진다. 그게 이치다. 인간과 세상과 우주를 관통하는 신의 섭리다. 마찬가지다. 붙들고 있으면 마음이 흐를 수가 없다. 붙들지 않을 때 내 마음이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야 건너갈 수 있다. 내 마음에서 신의 마음으로 건너갈 수 있다. 마음이 통할 때 기도도 통한다.

갈릴리 오병이어 교회의 바닥에 있는 모자이크. 물새와 뱀이 서로 싸우고 있다. 예수는 우리가 기도할 때 생선을 청하면 어찌 하느님께서 뱀을 주시겠느냐고 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더 자세하게 일러준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누가복음 11장11~13절)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누가복음 11장11~13절)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식에게는 잘한다. 왜 그럴까. 나와 자식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자녀를 그렇게 본다. 둘로 보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선을 청할 때 생선을 준다. 뱀을 주지 않는다. 달걀을 청할 때 달걀을 준다. 독을 품은 전갈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청할 때, 우리가 찾을 때, 우리가 두드릴 때가 문제다. 왜 그럴까. 우리는 머물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하느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베드로 통곡교회의 문.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는 예수와 손을 젓는 베드로가 새겨져 있다.

그러니 예수의 메시지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생략돼 있다. 그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이 ‘머무는 바없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들 메시지 앞에 ‘머무는 바없이’가 생략돼 있다. 그걸 넣으면 이렇게 된다.
머무는 바없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머무는 바없이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왜 불교 경전 구절을 그리스도교 성경에다 갖다 붙이느냐?”고 따진다. 그건 문자만 보기 때문이다. 문자 속에 담긴 이치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손가락이 아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다. 그 달이 우리의 삶을 평안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사 이미지

‘한국의 고흐’로 불리는 화가 이중섭(1916~56)의 1954년작 ‘달과 까마귀’. 둥그런 달을 배경으로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전깃줄에 있다. 까마귀가 달을 보지 못한다 해도 까마귀 뒤에는 달이 있다.

그럼 예수는 ‘머무는 바없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런 구절은 불교의 『금강경』에만 있는 대목일까. 아니다. 예수는 이미 ‘머무는 바없음’을 설했다. 성경의 곳곳에서 숱하게 ‘머물지 마라’고 강조했다. 그게 뭘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걸 뭐라고 표현했을까. ‘내맡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내맡김. 그게 바로 ‘머무는 바없음’이다.

겟세마네 바위에서 기도할 때 예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 제자들을 데리고 얼른 달아나면 예루살렘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피로에 절어서 잠에 떨어진 제자들을 뒤로 한 채 예수는 홀로 엎드려 기도했다.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그랬다. 예수는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비켜가길 바랬다. 그게 예수의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나의 뜻’에 접착제를 바르지 않았다.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집착을 허물고 머무는 바없이 기도를 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 머무는 바없을 때 기도가 통한다. 그럴 때 문이 열린다.

‘위대한 베네치아의 화가’로 불리는 후기 르네상스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의 1583년작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나의 뜻’을 허물고자 피땀을 흘리며 기도했던 예수를 천사가 안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자식이 대입 수능시험을 치를 때는 어떡해야 하나.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나.” 자식의 수능시험뿐만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온갖 파도들. 높고 낮은 파도들, 크고 작은 파도들 앞에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때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 어떻게 기도해야 문이 열릴까.

먼저 나의 기도에 손가락을 대봐야 한다. 끈적끈적한 접착제가 묻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 아이가 대학 입시에 절대 떨어져서는 안 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해. 떨어지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하느님.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라며 마음을 꽉 움켜쥐고 기도를 한다면 어찌 될까. 그런 기도가 과연 ‘출항의 뱃고동’을 울릴 수 있을까. 신을 향해 떠나려는 기도를 스스로 붙들고 마는 셈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구빈원 사람들’.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다들 각자의 상념에 젖어 있다. 앞에 펼쳐 놓은 성경책이 눈길을 끈다. 우리가 기도하는 얼굴도 저 그림 속의 하나와 닮았을까.

가령 하얀 도화지가 있다. 그걸 신의 속성이라고 하자. 그 위에 검정 잉크가 한 방울 떨어졌다. 그게 나의 집착이다. 집착할 때, 나는 잉크 속에 잠긴다. 거기서 기도를 한다. 절절하게 기도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는 멀리 가지 못한다. 까만 잉크 안에서 계속 맴돌 뿐이다. 왜 그럴까. 나의 기도에 내가 접착제를 발랐기 때문이다.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는 기도는 다르다. 집착하지 않는다. 그럼 잉크가 지워진다. 잉크가 지워질 때 바탕에 있던 도화지가 드러난다. 그때 기도를 한다. 그럼 도화지 위에서, 신의 속성 안에서 기도를 하게 된다. 잉크의 기도가 도화지에 잘 전달될까, 도화지의 기도가 도화지에 잘 전달될까. 무엇이든 속성이 같을 때 서로 통한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머무는 기도와 머물지 않는 기도는 다르다. 밧줄로 묶인 채 항구에서 뱃고동만 울리는 배는 출항할 수 없다. 바다로 갈 수 없다. 신의 속성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자식의 대학 입시를 위해서 말이다. “주님, 저희 아이가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이의 시험을 위해 제가 지혜롭게 뒷바라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집착이나 욕심으로 인해 아이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떠한 결과든 아이와 제가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듯 기꺼이 수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이런 식의 기도라면 어떨까. 여기에는 ‘머무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 놓음’이 보인다. 머물지 않는 기도는 항구를 떠난다. 바다를 향해, 신의 속성을 향해 나아간다.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 교회.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염할 때 썼다는 돌판이다. 사람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기도를 했다. 그들의 기도는 뱃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떠나갔을까.

나는 눈을 감고 예수의 어록을 다시 묵상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7~8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7~8절)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내가 집착을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지, 아니면 집착을 안고서 기도를 하는지 어떻게 아나? 그걸 누가 아나?” 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안다. 내가 움켜쥐고 기도를 하는지, 내가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지 자신이 안다. 다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안다. 자신의 내면을 보기만 하면 안다.

성묘교회에서 수도자가 불 붙인 초를 꽂으며 기도하고 있다. 기도는 자신을 태우며 불을 밝히는 초를 닮은 걸까.

그럼 기도는 단순히 욕망의 투영일까.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십자가였다. 스스로 짊어지는 ‘자기 십자가’였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기도를 통해 ‘나의 뜻’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청했고, 그런 방식으로 찾았고, 그런 방식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머물지 않았다. 그러니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숨어 있다. 그 괄호 속에 ‘십자가’를 넣어 본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성서 속의 인물들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흠 없는 첫 새끼를 바쳤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재산목록 1호’였다. 그런 소에서 태어난 첫 송아지가 얼마나 귀한 재산이었을까. 유대인들은 그걸 바쳤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것. 그걸 태우면서 그들의 집착도 태우지 않았을까.

아브라함도 그랬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조상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 그들 모두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부인 사라의 요청으로 하녀 하갈에게서 먼저 아들을 봤다. 그가 이스마엘이다. 사라에게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쯤 됐을 때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이삭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 처음 태어난 송아지도 아니고, 처음 태어난 어린 염소도 아니었다. 처음 태어난 자식을 바치라고 했다. 내가 가장 집착하는 대상. 하느님은 그걸 내려놓으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머리가 아팠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당시 중동 지역의 이민족들이 믿던 종교에서는 실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달랐다. 사람 대신 처음 태어난 가축의 새끼를 바쳤다. 그것으로 ‘사람 제물’을 대신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했다. 그리스도교 성경에는 그 자식이 ‘이삭’으로 기록돼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삭이 아니라 하갈의 자식인 ‘이스마엘’로 본다. 이삭보다 나이가 많았던 이스마엘을 첫 자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삭이 유대 민족의 조상이듯 이스마엘은 이슬람 민족의 조상이다.

스페인 화가 후안 데 발데스 레알(1622~90)의 ‘이삭의 제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말리고 있다.

아브라함은 결국 자식을 데리고 산으로 갔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소였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망설였을까. 몇 번이나 주저했을까. 그러다가 결국 칼을 빼들었다. 내려치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났다. 우리도 그렇다. 나의 집착을 내려놓을 때 천사를 만난다. 신의 속성을 만난다. 그런 순간에 기도가 항구를 떠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각자의 십자가’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나의 기도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수시로 기도를 한다. 크고 작은 삶의 파도 앞에서 기도를 한다. 파도를 치워달라고, 파도를 재워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건네려는 것은 파도가 아니다. 그 모든 파도를 품고 있는 바다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누가복음 11장13절)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누가복음 11장13절)

예수는 ‘성령’에 방점을 찍었다. 영어로는 ‘Holy spirit’. 그리스어로는 ‘pneuma(spirit) hagion(holy)’이다. 신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건 다름 아닌 ‘성령’이다. 크고 작은 파도를 다 녹여버리는 ‘신의 속성’이다.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돌풍이 불면 호수에도 거센 파도가 인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희로애락의 그 모든 파도를 잠재우는 바다야말로 신의 속성이 아닐까.

그래도 우리는 투덜댄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통하지 않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돼?”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일화를 하나 들어 설명했다. 한밤중에 벗을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 그가 빵 세 개를 꾸어달라고 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내어놓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다가 일어난 친구는 귀찮아 했다.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고,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빵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누가복음 11장8절)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누가복음 11장8절)

우리는 기도한다. 집착을 안고 기도한다. 잉크 속에서 기도한다. 그러다 투덜댄다. 통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검은 잉크 속에서 자꾸만 맴돌 뿐이라고.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 잉크의 바닥에 도화지가 있다고.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줄기차게 기도하라고. 머무는 바없이 기도하라고. 끊임없이 두드리라고 예수는 말한다.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수는 왜 포기하지 말라고 했을까. 줄기차게 요구하라고 했을까. 결국 문이 열릴 거라고 했을까.

나의 기도는 어디에 있을까. 스스로 그린 잉크 속에서 맴돌고 있진 않을까. 검은 먹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진 않을까.

우리가 이미 도화지 안에 있으면서, 도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