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예수는 실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법’까지 일러주었다. 하늘이 땅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누가복음 6장27절)다.사람들은 갸우뚱한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리고 이렇게 추측한다. “아! 맞아.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싸울 일이 없겠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겠지. 그러니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셨겠지.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래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물음표가 하나 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왜 싸우지 않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좋으면 ‘선(善)’이고, 나에게 싫으면 ‘악(惡)’이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선인(善人)’이고, 내게 못하는 사람은 ‘악인(惡人)’이다. 우리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항상 ‘나’이다. ‘나의 이익’ ‘나의 철학’ ‘나의 잣대’다. 그걸 기준으로 이쪽은 선, 저쪽은 악이 된다.아담과 이브도 그랬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에덴동산에 선악은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선도 몰랐고, 악도 몰랐다. 에덴동산은 그런 곳이었다. 선과 악으로 쪼개지지 않은 ‘온전한 곳’이었다. 그래서 낙원이었다. 선악을 나누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 그러니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부부싸움도 없었을 터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비로소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도 벌어졌을 테니까.
한마디로 ‘선 긋기’다. 내 마음의 선 긋기. 그로 인해 ‘이쪽과 저쪽’‘좋고 나쁨’ ‘선과 악’이 생겨난다. 그렇게 그은 선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뭉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 그걸 ‘에고’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어 놓은 숱한 ‘선(線)’들이 뭉친 게 에고다. 그 선들이 에고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그 선(線)을 지우려면 말이다. 그 선을 지워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야 우리가 ‘에덴 동산’을 만날 테니까 말이다.원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은 ‘마음의 선’에 의해 원수가 생겨난다. 그 선의 이쪽은 아군, 저쪽은 적군이 된다. 나를 살리려 하면 아군이고, 나를 죽이려 하면 적군이다. 그 중에서는 그냥 원수가 아니라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아군보다 적군을 더 자주 생각한다. 그렇게 떠올릴 때마다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긋는다. 선은 갈수록 굵어지고, 갈수록 깊어진다. 그래서 원수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그럼 예수는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예수에게 주목했을 사람들. 저마다 가슴에 선을 긋고, 저마다 마음에 원수를 품었을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장28절)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장28절)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누가복음 6장29~30절)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누가복음 6장29~30절)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6장35절)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6장35절)
왜 그랬을까. 왼쪽 뺨을 맞고서 반대쪽 뺨을 다시 내미는 일과 가장 높은 분의 자식이 되는 것.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이 구절을 단순히 ‘예수의 포상’으로만 읽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식이 되려는 ‘포상’을 바라면서 그렇게 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그(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누가복음 6장35절) 예수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에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었다. 원수에게 건넬 때도 그렇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때도 그렇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행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언가를 바랄 때 마음에 또 하나의 선을 긋게 되기 때문이다. 그 선들이 뭉쳐서 나의 에고가 된다.예수는 오른쪽 뺨을 내밀고, 속옷까지 건넬 때 왜 그분의 자식이 되는 지도 말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복음 6장35~36절)
그분(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복음 6장35~36절)
그러니 오른뺨을 맞고서 왼뺨을 내미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겉옷에 이어 속옷까지 내주는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걸 통해 내 마음에 그어놓은 ‘잣대의 선(線)’을 지우는 게 목적이다. 왼뺨을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내밀어도 ‘내 마음의 선’이 지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죄없는 뺨만 아플 뿐이다. 원수를 수천 번 사랑한다 해도 ‘내 마음의 선’이 무너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원수는 여전히 원수일 뿐이다. ‘내 마음에 그은 선’이 하나ㆍ둘 지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닮게 된다.사람들은 묻는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알려달라. 우리가 어찌해야 ‘신의 속성’을 닮을 수 있나.” 예수도 그런 질문을 숱하게 받지 않았을까. 그래서 늘 생활에서 쉽게 보이는 것들에 비유해 설교를 했다. 예수는 이 모든 이치와 원리를 간추리고 간추려서 유대인들에게 ‘실전용 핵심 총정리판’도 내놓았다. 딱 한 마디로 설명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누가복음 6장31절)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누가복음 6장31절)
"네 마음에 선을 그을 건가, 아니면 지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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