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7. 23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중에서
그리스도교는 행위의 종교일까. 행위의 종교라면 ‘룰(rule)’만 지키면 된다.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가고, 십일조에 맞춰 헌금을 하고, 교회를 위해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하면 된다.
어쩌다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에게 전도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그 불신자가 타종교를 믿던 사람이라면 뿌듯함은 더 커진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서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내가 실천하는 기분이다.
그 정도만 해도 왠지 든든하다. 천국에 복을 쌓는 느낌이다.
그러니 내가 천국의 문 앞에 섰을 때 그 문이 ‘스르르’ 열리지 않을까.
왜 그런 확신을 하느냐고? 나는 룰을 지켰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분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너무 익숙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이 풍경을 본 적이 있어. 이런 생각을 읽은 적이 있어. 이런 신앙을 만난 적이 있어.
그게 어디였지? 어디서 저런 이야기를 접했었지? 어디서 저런 사람들을 만났었지?” 그렇게 가만히 되짚어 봤다.
그러다가 찾아냈다. 내가 그들을 만난 곳은 ‘성서’였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누구일까. 다름 아닌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행위’를 믿었다. 행위가 구원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누구일까. 다름 아닌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행위’를 믿었다. 행위가 구원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에 대한 이야기가 한 토막 있다.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를 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었다. 그건 오래된 전통이었다.
유대인들이 정해진 거처도 없이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구약 시대에는 성막을 쳤다. 일종의 천막이다.
그 안에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판을 넣었다. 소떼와 양떼를 몰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수레에 싣고 성막도 함께 옮겼다.
그들의 생활과 삶, 그 중심에 성막이 있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웠고 성막은 성전이 됐다.
천막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건축물이 세워졌지만 기능은 똑같았다.
성전은 신을 만나는 장소였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걸 ‘매우 각별한 경험’으로 여겼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세금 징수원)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기도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꼿꼿이 서서 기도하며 혼잣말로 말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바칩니다.”(누가복음 18장11절)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랬다. 가만히 뜯어보면 우리의 기도와 똑 닮았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랬다. 가만히 뜯어보면 우리의 기도와 똑 닮았다.
“저는 교회에 출석하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갈 때도 있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무엇보다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그들과 다름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 이런 식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와 무엇이 다른 걸까. 우리는 생각한다.
내게는 예수가 있지만, 저들에게는 예수가 없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저들에게는 불행이지만 내게는 다행이라고.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간 세리의 기도는 달랐다.
세리는 멀찍이 섰다.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누가복음 18장13절) 이렇게 기도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 당대에 세금 징수원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벌레처럼 취급했다. 그런 세리가 하느님에게 이런 기도를 했다.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판정은 어땠을까.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판정은 어땠을까.
예수는 그들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이 역시 누가복음에 기록돼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가복음 18장14절) 왜 그랬을까.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는 건 쉽지 않다. 배고픔은 물론,
그로 인한 이런저런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바리새인은 주 2회 단식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그리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놓았다. 십일조라고 하지만 요즘도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이는 많지 않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회계사의 공증 아래 정확하게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교회가 있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러니 그 바리새인처럼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게 쉽진 않다. 그럼에도 바리새인은 그걸 지켰다.
그러니 그가 보여준 ‘신에 대한 충성도’가 얼마나 큰 것일까.
그럼에도 예수는 손을 내저었다.
바리새인은 의로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의로워진 채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오히려 세리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무언가에 맞아떨어지는 걸 의미한다. 그게 뭘까. 세리는 기도를 통해 무엇에 맞아떨어지게 된 걸까. 그건 ‘신의 속성’이다.
우리가 ‘신의 속성’에 부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녹아들게 된다.
세리를 칭찬하던 예수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누가복음 18장14절)
예수가 말한 ‘높아짐’은 달랐다.
예수가 말한 ‘높아짐’은 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높아짐’과 차원이 달랐다. 그건 ‘행위’를 쌓아서 올라가는 높아짐이 아니었다.
왜 그럴까. 행위를 쌓아서 올라갈 때는 에고도 쌓여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체다카’가 작동하지 않는다.
세리는 달랐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자신을 무너뜨렸다. 늘 그렇다. 에고를 무너뜨릴 때 ‘체다카’가 작동한다.
누가복음 18장을 펼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누가복음 18장을 펼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바리새인와 세리의 일화를 말한 사람은 예수였다. 그럼 예수는 누구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었을까.
예수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던 이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8장9절)
그러니 예수가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주위에는 바리새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들처럼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바리새인은 생각했다.
‘나에게는 하느님이 있다. 그러나 세리에게는 하느님이 없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니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지.’ 행여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는 예수님이 있다. 저들에게는 예수님이 없다. 그러니 전해주어야지.
내게는 있고 저들에게는 없는 ‘예수’를 전해주어야지.’ 그런데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달리 말한다.
“그런 생각은 큰 오산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범하는 큰 착각이다.
내게는 있고 상대방에게는 없는 예수가 아니다. 나만 가진 예수를 상대방에게 전해주는 게 아니다.
예수는 내가 가기도 전에 이미 그곳에 가 있다. 내가 예수를 전달하기도 전에 이미 그 사람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할 일은 그런 예수를 찾아내는 일이다. 내가 예수를 전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방 속에서 살고 있는 예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바리새인의 사고 방식은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방식과 통한다.
바리새인의 사고 방식은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방식과 통한다.
총과 칼을 앞세우고 신대륙을 개척할 때 뱃머리에는 늘 사제나 선교사들이 탔다.
왜 그랬을까. 나에게만 있고 저들에게는 없는 예수. 그런 예수를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전달 방식은 제국주의적 정복 방식과 여러모로 맞아 떨어졌다. 그들이 전하려 한 예수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늘 내가 무너진 곳으로 찾아온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말에서 떨어져 눈이 멀고서야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났다.
간디는 식민지 인도를 떠나가는 영국인에게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가져가고, 성경 속의 예수는 두고 가라”고 했다. 바리새인의 눈은 멀 수가 없다. 꼿꼿이 서서 기도하는 그들은 ‘나의 눈’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내가 만든 하느님,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을 만난다.
예루살렘 성전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이 아닐까. 내게만 하느님이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이 아닐까.
아무리 기도의 버튼을 눌러도 ‘체다카’가 작동하지 않는 바리새인이 아닐까.
예수의 지적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바리새인이 아닐까.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형식적인 존경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존경이었다. 이스라엘은 고대로부터 주변 국가의 침략을 수시로 받았다.
그 와중에 오랜 세월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기원전 171년 수리아(시리아)는 이집트를 물리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았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그리스신 조각상이 세워지고 돼지의 피로 제사가 행해졌다.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은 민족’이란 징표인 할례도 금지됐다. 유대인들이 받았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까.
유대인들은 항거했다. 그 저항의 중심에 바리새인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항거했다. 그 저항의 중심에 바리새인이 있었다.
‘바리새인’이란 당파가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이 수리아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칠 때였다.
2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이스라엘은 수리아를 물리쳤다. 당시 바리새인은 제사장 집안인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마카베오 가문은 곧 변질됐다. 사치를 일삼고 세속적인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건 성서의 지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어긋나는 조치였다.
바리새인이 보기에는 신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래서 마카베오 가문에 맞서 싸웠다.
당시 마카베오 가문의 권력은 막강했다.
당시 마카베오 가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유대인들이 다들 무서워서 고개를 숙일 때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순교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걸 유대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어땠을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좇고, ‘유대의 정체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들 두려워서 아무도 “노(NO)!”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손을 번쩍 들고 “그건 아니오!”라고 외친 이들이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니 유대 백성들은 그들을 믿었다. 그들을 존경했다.
예수 당대에도 그랬다. 바리새인들의 꼿꼿함은 그대로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와 유대 왕족인 헤롯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다.
사두개파인 제사장들도 헤롯 가문에 협력하고, 그 대가로 성직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때도 바리새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황제와 헤롯 가문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당시 바리새인의 숫자는 600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척 컸다. 바리새인들이 말을 듣지 않자 왕은 급기야 벌금을 부과할 정도였다.
바리새인의 꼿꼿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박제가 돼 갔다.
바리새인의 꼿꼿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박제가 돼 갔다.
종교로 따지면 ‘율법주의자’가 됐다. 그들은 ‘행위’에 방점을 찍었다. 행위는 격식으로 굳어졌고,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격식을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로만 비쳤다. 그럼 예수는 어땠을까. 예수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예수도 행위를 중시했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예수는 아버지 뜻에 대한 ‘행함’이라고 했다.
그럼 예수의 행위와 바리새인의 행위는 무엇이 다른 걸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장21절) 예수는 정확하게 ‘실행’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리스어로는 ‘포이에오(poieo)’다. 영어로는 ‘act(행하다)’‘make(만들다)’‘produce(생산하다)’의 뜻이다.
예수는 앉아서 암송만 하지 말고, 기도만 하지 말고, 실행하라고 했다. 그래야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생긴다고 했다.
뿐만 아니다. 그 대목에 이어서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다.
뿐만 아니다. 그 대목에 이어서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복음 7장24~25절)
이번에도 ‘행함’이다. 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이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했다.
그래야만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바리새인들도 ‘행위’를 강조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그럼 둘은 무엇이 다른 걸까.
자전거를 예로 들어보자.
그럼 예수의 말은 이렇게 바뀐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자전거를 아는 게 아니다.
내가 일러준 대로 직접 페달을 밟아본 이라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바란다. 자전거를 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외친다. “주님! 주님!” 예수는 말했다. 그런다고 자전거를 타게 되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예수가 일러준 열쇠는 ‘행함’이다. 직접 자전거를 타보는 일이다.
그럼 바리새인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행동할까.
그럼 바리새인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행동할까.
그들의 관심사는 결과물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뿐이다.
그들이 들이미는 신앙의 잣대도 그렇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아는가, 당신은 자전거를 탈 줄 아는가” 그것뿐이다.
그게 다다. 그래서 놓친다. 그들은 자전거만 알지, 바람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전거만 알지, 뒷좌석은 모른다. 그들은 자전거만 알지, ‘따르릉’하는 벨 소리는 모른다.
예수는 다르다. 예수가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라고 한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예수는 다르다. 예수가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라고 한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건 결과물만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예수가 설한 ‘자전거 타는 법’을 읽는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열 번, 스무 번 읽는 사람도 있고, 백 번이나 이백 번씩 읽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타는 방법을 숙지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자신이 이미 자전거를 안다고 생각한다.
탈 줄도 안다고 생각한다. “주여! 주여!”만 목이 터지게 외치면 자전거는 저절로 타는 걸로 생각한다.
예수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성서 속의 ‘자전거 타는 법’을 직접 행하라고 했다.
자전거의 핸들을 잡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라고 했다. 안장 위에 앉아서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엉덩이의 감촉을 느껴보라고 했다.
두 발을 페달 위에 놓고서 돌려보라고 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느낌,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느껴보라고 했다.
그걸 시도하며 넘어져 보라고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어보라고 했다. 성서를 읽을 때는 몰랐던 시행착오를 직접 체험해 보라고 했다.
그게 없다면 어찌 될까. 그런 시행착오가 없다면 어찌 될까. 나는 머리로만 자전거를 타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행하라고 했다. 직접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는 행하라고 했다. 직접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다.
그건 단순히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결과물을 겨냥한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의 자전거는 바리새인들이 집착했던 ‘행위의 자전거’가 아니다.
예수는 ‘행함’을 통해 ‘자전거의 속성’을 체득하라고 한 것이다. 핸들과 안장과 페달만이 자전거의 전부가 아니다.
‘자전거의 속성’에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바람을 가를 때의 상쾌함과 이마에서 흐르는 땀까지 포함돼 있다.
고개를 들면 펼쳐지는 푸른 하늘까지 담겨 있다. 그 모두를 통해 ‘자전거의 속성’을 익히라고, 그 속성과 하나가 되라고 한 것이다.
그럼 예수가 내민 자전거는 뭘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자전거를 탄다는 건 그 뜻을 행함이다.
그 뜻을 행하면 어찌 될까. 우리는 ‘신의 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자전거를 타면서 우리는 ‘신의 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내가 부서지고, 이웃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전거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내가 부서질 때의 시원함과 신의 속성이 드러날 때의 깊은 고요를 알게 된다.
그게 바로 ‘반석(盤石)’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다.
그게 바로 ‘반석(盤石)’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다.
그 반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다.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나의 삶이라는 집을 그곳에 지어야 한다.
반석이 무너지지 않아야 집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반석이 바로 ‘신의 속성’이다.
예수가 ‘행함’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반석을 찾기 위함이다.
“주여! 주여!”한다고 그 반석이 찾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페달을 밟아봐야 그 반석이 찾아진다. 그 페달이 바로 ‘행함’이다.
그렇다고 ‘행함’이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행함’이 목적이 아니다.
‘행함’을 통해 반석을 찾는 게 목적이다. 바리새인들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행함’에만 계속 방점을 찍었다. 반석이 빠져버린 행함은 이데올로기가 되게 마련이다.
‘신의 속성’은 이치를 관통한다. 나와 삶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치다. 그런 이치를 관통할 때 우리는 지혜로워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복음 7장24절)
내가 뿌리내린 반석(신의 속성)을 통해 나의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기로워진다.
‘나만 아는 예수.
상대는 모르는 예수. 우리만 아는 예수.
저들은 모르는 예수. 그런 예수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가슴이 너무 좁지 않을까.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다.
바람이 불었다. 성전 앞 뜰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물었다.
'나의 하느님은 다른가. 바리새인이 믿던 하느님과 다른가.
내가 만든 하느님,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 그것과 과연 다른가.’ 바람이 불고, 또 불었다.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3 - 내가 만든 예수, 내가 만든 하느님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3 - 내가 만든 예수, 내가 만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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