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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영그는 날]/세상다듬기(에세이)

일본 ◀ 무너진 조세이 해저탄광에 조선인 136명 수몰 ▶

by 만경사람(萬頃人) 2025. 2. 3.

2025'    02.    03.    일본 조세이 해저탄광의 붕괴로 

 

조세이(長生) 탄광 _.

 

일본 바닷속 무너진 탄광, 거기 조선인 136명이 있었다

대구에서 온 92세 전석호씨는 갱구를 향해 한국어로 외쳤다. “아버지! 저예요. 제가 왔어요.” 그는 무너지듯 소리 높여 울었다. 그의 아버지는 40세에 조세이 탄광에서 수몰사고를 당했다.

20241026일 조세이 탄광 입구 앞에서 갱구를 열었다! 82년의 어둠에 빛을추모 집회가 열렸다.슈칸 긴요비 제공

 

일본 세토 내해(혼슈·시코쿠·규슈에 둘러싸인 바다) 서부의 스오나다 구역에서 튀어나온, 반도처럼 생긴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 현지인들이 피야(ピーヤ)’라고 부르는, 큰 원통형 배기 탑 두 개가 해수면 위로 돌출해 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223일 오전,이 앞바다에 펼쳐진 탄전(석탄이 묻힌 땅) ‘조세이(長生) 탄광에서 대규모 수몰사고가 발생해, 183명이 산 채로 해저에 갇힌 현장이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조차 의외로 이 사실을 모르고, 하물며 희생자의 7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는 점은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숨겨진 사실을 파헤쳐 기록하고, 조선·한국 단체와 함께 추모해온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유골 발굴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먼저 해안부의 본갱구를 찾아냈고, 20241029일부터 잠수 조사를 시작했다. 일본 전국 강제노동 현장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골을 가족품으로 되돌려주려는 노력 중에서도 큰 성과다.

 

지금도 그 해저에 잠들어 있는 조세이 탄광의 희생자 중 한 명인 김원달씨가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내용이다.

어머니, 저는 지금, 일본의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 일을 하고 있어요. 바다 밑에 갱도가 지나고 있어서, 바다 위를 다니는 어선들의 통통거리는 소리도 들려올 정도로 매우 위험한 장소입니다. (···) 탈출하기에도 매우 어렵습니다. 울타리는 3m 정도의 두꺼운 소나무 판자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쪽은 철조망이 가득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경비도 삼엄하고, 일절 자유도 없으며, 외출도 할 수 없는 구속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 어쨌든 반드시 탈출해서, 꼭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고 3개월 전부터 물이 계속 새고 있어서, 관리자는 수몰사고가 임박한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조세이 탄광 광업소는 해저 갱도에서 도망치려고 우왕좌왕하는 노동자들을 구출하기는커녕, 단단한 소나무로 갱구를 막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곳에 대형 쓰레기 더미가 쌓였다.

20249월 말, 지역 시민들의 오랜 조사와 피해자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 끝에그 갱구가 발견되었다. 중장비 두 대로 쓰레기와 소나무 더미를 파헤치자 갱구가 나타났다. 그리고 은폐되었던 입구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의 탄식을 우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본에게 조선인은 대체 무엇인가. 바다를 향해, 소리치고 싶어졌다.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직후 발간된 194224일자 조간신문 보도들.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발발 2년째인 194223일 오전 930분경에서 10시 사이에 발생했다. 몇 안 되는 생존자나 기술자의 증언, 조세이 탄광 광업소 측 기록으로 그렇게 추정되고 있다. 도코나미 해안의 본갱 갱구로부터 1010m 떨어진 장소에서, 갱도의 천장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 수몰사고다.

우베시 향토사 연구자들이 알려

수몰 지점에서 수평갱도(횡혈)의 앞바다 쪽으로 개미집처럼 이어진 여러 채굴 구역이 있었다. 이 채굴 현장에 투입된 조선인 136명을 포함한 183명이, 탈출 경로가 물이나 유목으로 막힌 상태에서 넘쳐 흘러온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되었다.

당시의 사고 개요 보도는, 다음 날 신문 등에서 작은 속보를 내는 데 그쳤다. 그 밖의 정보는 전시의 정보 통제로 숨겨왔지만, 바닷물 속에서 갱구까지 헤엄쳐 구사일생한 생존 조선인 노동자 4명이 전쟁 중이나 전쟁이 끝난 뒤에 증언을 하면서,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역시 오랫동안 지워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고 당시 침수 장소에서 1더 떨어진 곳에서 석탄을 캐고 있던 이종천은, 1980년대에 조선 근현대사를 연구하던 가지무라 히데키 씨에게, 아래와 같은 취지의 귀중한 증언을 했다.

본선(수평으로 뻗은 트럭 전차 갱도)은 먼저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뒷사람이 앞에 넘어진 사람을 밟고서라도 도망치려는 상황이었다), 옆으로 난 옛 갱도로 도망쳤다. 갱도도 높낮이가 있어서 갱목(갱도에서 쓰는 나무)들이 오가고 있었다(갱내에서 가장 낮은 곳이 바다 쪽 피야아래 근처로, 거기에 배수펌프가 있는 펌프실이 있었다). 갱목을 타고 도망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바다 쪽으로 되돌려 보내지기도 했다. 7~8m만 더 가면 나갈 수 있는데도 밀려나서 죽은 사람도 많았다. 매달려 있던 밧줄을 붙잡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1982바다가 터졌다!).”

전후에도 오래 숨겨왔던 수몰사고의 비사를 세간에 처음 알린 이들은 일본 현지 우베시의 향토사 연구자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초대 대표·이하 새기는 모임’)에 의한 1976년의 지역사 연구논문이었다.

새기는 모임19913월 출범했다. 이듬해 경북·경남 출신 유족을 중심으로 한국 유족회 결성, 한국 정부 기관인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에 의한 조사 추진, 두 재일조선인 단체인 조선 총련과 한국 민단의 협력 등에 의해 진실규명 조사나 희생자 추모 등도 비약적으로 진척되었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은 우치오카 사다오 씨(77·현 고문)의 조사에 의하면, 수평갱도가 해저 40m가량인(실제로는 37m 이하) 해저탄전은 수압을 견딜 수 없기에 원래가 위법한 조업이다. 사고 당시의 조세이 탄광 경영자였던 고 라이손 후치노스케 전 회장 스스로, 전후 즉시 보안 기준을 위반한 위법 조업이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누수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1942년의 수몰사고는 명백한 인재였다.

20241026일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추모 집회에 참석한 조선인 피해자의 유족 전석호씨.슈칸 긴요비 제공

 

조세이 탄광 경영진은 조선총독부와도 두터운 인맥을 갖추고, 일본 정부와 함께 경상도 내의 군··리 원로와 책임자를 포섭해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확보했다. 모집·관 알선·징용의 3단계 조선인 강제연행을 통해, 조세이 탄광 노동자 수는 193910249명에서 19421258명이 되었다. 야마구치현 탄광 가운데 최다 동원 숫자였다. 수몰사고 전년도인 1941년 조세이 탄광은 경영 사상 최고의 출탄양을 기록했다.

조세이 탄광에서는 석탄 캐기, 땅굴 파기, 갱도 보수 등 작업 현장의 절반 가까이가 조선인에게만 맡겨져 있었다. 연행된 조선인 다수는 합숙소’ 4개 동에 수용되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3m 이상의 높은 판자로 된 울타리에 둘러싸여 감시원에게 밤낮으로 감시당했다. 1939년판 특고월보에는, 탄광의 제1회 연행자 238명 중 41명이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에도 조선인 노동자의 도망은 멈추지 않았고, 194010월의 입소식 전에는 13명이 집단 탈주했다.

위험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피해 도망간 이들 조선인 노동자 중에는 감시인들에게 붙잡혀서 린치를 당하고 구타당해 살해된 자가 적어도 2명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우치오카 씨가 새기는 모임에 관여하게 된 것은 20092월부터다. 지쿠호(후쿠오카현 중앙 부분)의 옛 탄광지대 현장 연구에 참여하던 중에 어떤 재일조선인 2세 구술자로부터 조세이 탄광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립학교 교사 생활을 오래 한 그는 제자 중에 재일조선인 학생이 많아서 특히 관심이 갔다고 한다.

그에게 조세이 탄광 관련 활동의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은, 20153월에 우베시에서 개최된 강제동원 진상규명 전국연구집회였다. 이때 한국에서 일본에 온 희생자 유족 한 명이 저의 유일한 소원은 바닷속에 방치되어 있는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고 돌아가는 것이라고 오열했다. 우치오카 씨를 비롯한 새기는 모임운동가들은 조세이 탄광 갱구 조사와 갱구 특정을 우선 과제로 삼는 한편, 유족에게 DNA 검체 제공을 요청하고, 유골 발굴을 위해 한·일 양국 정부에 대한 교섭 등도 진행해왔다. 지금 이 모임은 유족에게 받은 희생자 30명분의 DNA 감정용 검체를 보관하고 있다.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 118

새기는 모임은 조선인 유족의 창씨개명 전 이름을 확인하는 등 유족을 찾아내려는 남다른 노력을 쏟았다. 199110월경부터, 조세이 탄광 광업소 광무과 등에 남겨져 있던 집단 도항 선인(편집자 주: ‘선인은 조선인을 가리키는 민족 차별 용어다)’ 기록이나 사고의 순직 산업인 명부(대일본산업보국회, 194011월 작성)’, 지역 사찰인 사이코지에 보관되어 있던 희생자 위패 등을 정밀히 조사해 사고 희생자의 출신지(본적지)를 확인해갔다.

새기는 모임은 이를 바탕으로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불리는 유족 확인 문서 118(한국 수신 1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신 6)을 국제우편으로 발송했다. 놀랍게도 무려 17통의 답장이 왔고, “새기는 모임의 편지로 가족이 조세이 탄광에서 숨진 것을 처음 알았다라는 유족도 많았다. 199112월에는,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계기로 고향인 경상남도에서 연락을 받은, 당시 도쿄에 거주하던 재일조선인 이원재씨가 사고 후 처음으로 현장으로 급히 와서 돌아가신 것은 저의 아버지, 이강신이다라는 증언을 했다.

재일 동포 서정길씨(80)가 조세이 탄광 조선인 합숙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가리키고 있다.연합뉴스

 

유골 탐색의 전 단계로 본갱도에 연결된 입구를 찾는 굴착공사에는, 본래 토지 소유자인 현지 지방자치단체도, 조사할 책임이 있는 국가(담당은 후생노동성 인도조사실)도 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베시나 일본 정부를 설득해온 새기는 모임간부들은 2024년 여름, 자력으로 해안부의 굴착공사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변호사 상담도 해가면서 국가·지방자치단체에 사전 통지하는 형태로 실력 행사를 단행했고, 파괴된 잔해와 쓰레기 층에서 약 4m 아래에 파묻혀 있던 본갱도의 입구를 발견한 것이 지난해925일이었다.

입구는 나무틀로 둘러싸여 두꺼운 판자로 덮여 있었고, 만조 시 바닷물이 육지로 흘러나가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소나무로 만든 두꺼운 판자를 제거하자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높이 1.6m, 2.2m로 한 명씩은 들어갈 수 있지만 두 명이 지나가기는 어려운 크기다. 입구를 보니 왼쪽에는 트럭 궤도도 있었던 것 같다.

지난해 1026일에는 그 입구 앞에서 갱구를 열었다! 82년의 어둠에 빛을이라는 이름의 추모 집회가 열렸다. 1030일부터는 다이버 이사지 요시타카 씨(36) 등의 협력으로 갱구에서 본갱도 잠수 조사도 시작되었다.

20241026일 갱도 입구 앞 집회 당시 한국에서 유족 방문단 14, 재일 유족 2, 일본인 유족 4명을 포함해 250명 이상이 참가했다. “아버지! 저예요. 제가 왔어요.” 대구에서 온 전석호씨(92)는 아들과 딸의 부축으로 휠체어에서 내려, 갱구를 향해 한국어로 그렇게 외친 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러고는 무너지듯 소리 높여 울었다. 그의 아버지 전성도씨는 40세에 수몰사고를 당했다.

전석호씨는 1942년 사고 당시, 일본 우베시 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사고 다음 날에는 갱도에 있던 전원의 생사도 불분명한 채 갱구가 봉쇄돼버려 이 갱구 앞에 매일 와서 아버지! 아버지라고 외치며 울었다고 한다. 사고 후 가족은 사택인 탄광주택에서도 쫓겨나 인근 마구간을 빌려서 살았고, 전후에는 귀국했지만, 가난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4세 여성은 아버지와 추모식에 참가했다. 그의 증조부가 사고 희생자였다. 그는 희생자의 장녀인 할머니로부터 내 아버지와 숙부는 우베에서 강제노동 끝에 탄광 사고로 돌아가셨다라고 들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하는 연립주택에서 매일 밤 싫다. 이제 일하고 싶지 않다라고 덩치 큰 어른이 울부짖는 소리, 일본인 관리자에게 채찍이나 곤장으로 맞아 우는 소리가 들려서 무섭고 아직도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손녀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추모 집회에서, 20세에 수몰사고로 희생된 양임수씨의 조카인 양현 한국 유족회 회장(76)이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유골을 향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감금 생활과 감독들의 감시로 인간이 아닌 소모품 취급을 받으면서도, 하루하루 원한과 고통의 지옥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셨을 것을 생각하면, 이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시민단체(새기는 모임)가 하고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유족들의 절실한 소원인 유골 발굴과 고향 봉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기본적인 도리이며, 일본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자가 해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023128일본 조세이 탄광 희생자 한국 유족회양현 회장이 일본 정부에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로 숨진 조선인 136명의 유골 발굴을 촉구하고 있다.연합뉴스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양 회장은 가슴이 벅차지만, 오늘의 행사는 갱구가 열렸다는 기쁜 일이라기보다 실은 슬픈 일이다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일본 정부는 미래를 향하자고 주장하지만, 과거를 버리고서 미래는 없다. 일본 정부는 먼저 사과해야 한다라고 거듭 말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일본 정부의 지금 자세를 비난하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이 사안을 후생노동성 직업안정국의 인도조사실대응에 맡긴 것에 큰 문제가 있다. “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는 전쟁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 징병되거나 해서 해외에서 사망한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고방식, 즉 지금까지도 반복되어온 국가의 논리인 군인·군속 이외에는 보상도 유골 조사도 수집도 하지 않는다는 군인 우선·민간인 전쟁피해 외면의 원칙에 매달려온 것이다.

조세이 탄광 희생자는 전몰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인데, 이상하게도 새기는 모임의 대정부 교섭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후생노동성 인도조사실에는 적어도 2018년도 이후, ‘조선반도 출신 옛 민간 징용자 등의 유골 반환 사업비 예산액 일람9087000엔에서 14807000엔까지, 매년 1000만 엔 가까운 예산이 계상되어 있다. 지난해에는 12368000엔이 계상되었고, 금년도에는 같은 액수가 보고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집행액인데, 최근 5년간 최고액이 2019년도의 119000, 나머지는 4~5만 엔대, 2018년과 2020년은 0엔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인가. 몇만 엔의 집행액 내역은 회의 다과비인지, 참고인에 대한 교통비 사례인지, 요즘 같은 때에 1000만 엔 가까운 집행비가 계속 남는다면 회계검사원도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흔적도 없다. 이에 대해 후생노동성 측에 문의하자 외교상의 개별적인 교환이 있기 때문에 일절 답할 수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새기는 모임이 진행하고 있는 조사·발굴사업을 위한 시민 대상 크라우드 펀딩 모금액은 1200만 엔을 넘었지만,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다. 갱구에서 조수 간만이 관찰되는 만큼 유골 일부가 유출될 수도 있어서, 주변 조류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1월 말~2월 초 뚫린 갱구를 더욱 보강해 잠수에 의한 본격 조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 기사는 시사IN과 기사 교류를 맺은 일본 독립 언론 슈칸 긴요비1498호에 게재된 내용을 옮겨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