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어느 백수의 일기"
▶▶버려야 할 것
올해로 26살.나는 다시 실업자가 됐다. 대학에 입학했던 2004년만 해도 이런 처지는 상상도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변변찮아 4년제 대학에 갈 형편이 안됐다. 같이 당구장을 전전했던 친구들은 그나마 지방대라도 갔다. 그 때 공부 좀 할 걸….그래도 전문대에는 합격했다. 기왕 전문대를 가는 김에 취업이 잘 된다는 조리학과를 골랐다. '2003년 취업률 98%,전국 최고!'라는 대학 광고가 귀에 쏙 들어왔다.
대학 생활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2년이란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학기 초부터 계속된 MT와 단합대회,하루 걸러 잡히는 소개팅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같은 과의 여자애들은 1학년 때부터 한식은 기본이고 일식,양식,중식 자격증을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자격증 하나 따볼까 생각했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년이 훌쩍 지나갈 무렵 서서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군대 다녀온 복학생 선배들 가운데 절반이 취업을 못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실습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선배들에게 술 사달라고 조르기도 미안했다. '군대 갔다와서 생각하자….'
군대 시간은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흐르다가 어느 순간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논산훈련소에 간게 엊그제 같은데 병장 말년을 맞았다. 다시 시작된 고민.휴가 때마다 만나는 친구 녀석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져만 갔다. "○○는 어떻게 살아?" "호텔에 취직했는데 아직 시다(보조)야." "△△는?" "몰라…,연락이 안돼."
2007년 3월,드디어 복학이다. 맘 잡고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조리사 자격증 책부터 샀다. 학원도 등록했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공부할 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한다는 '4당5락'(四當五落:하루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의 생활도 해봤다. 한식,양식,중식 등의 자격증이 하나둘 손에 들어왔다. 이만하면 취업 전선에 나서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학점은 4.0 만점에 3.8점으로 끌어올렸고 자격증 숫자도 다섯개로 늘렸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운영하는 외식업체에 첫 원서를 낸 것을 시작으로 20군데 넘게 지원했다. 연이은 불합격 통보.취업의 신(神)은 나를 버린 것 같았다. 제빵회사에 취직한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언젠간 되겠지.너,자격증도 많잖아." 녀석의 말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소주 잔을 기울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내 스펙에 뭐가 모자란 걸까?'
결론은 영어였다. 700점대 후반인 토익점수가 취업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로 1년간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정년 퇴직을 1년여 앞둔 아버지는 조용히 담배만 피우셨다.
캐나다 어학연수는 따분했고 영어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반년이 지날 무렵 미국에서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터넷을 통해 본 국내 소식은 어둡기만 했다. 실업자가 더 늘어날 것이란 우울한 소식이 연일 신문 경제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귀국한 지 5개월이 하릴없이 지났다. 어학연수까지 다녀왔지만 취업 관문은 더 좁아졌다. 부모님 몰래 몇 군데 원서를 내봤지만 죄다 떨어졌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 도서관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용돈은 하루 1만원.부모님 보기가 미안해 술도 마시지 않았다. 백수 생활에도 권태기는 있는 법이다.
백수카페에서 본 글이 생각났다.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 만든 사회적 기업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담당자에게 사정한 끝에 간신히 일자리를 구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쿠키를 만들고 받는 월급은 73만원.부모님에겐 조그만 외식업체에 임시직 자리를 구했다고 거짓말했다. 그러기를 6개월,부모님이 알아채셨다. '어학연수까지 보내놨더니 고작 이거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안그래도 마뜩찮던 참에 회사를 그만뒀다. 다시 기약없는 백수생활이 시작됐다. 오늘도 도서관과 집을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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